일상's/에세이

잊혀지지 않는 순간을 떠올리며

Best정보통 2021. 6. 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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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든지 살다 보면 기쁠 때, 노여울 때, 슬플 때,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개인 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으며 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몇 가지 특별했던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에게도 살아오면서 잊혀지지 않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가장 힘들었지만 그 순간을 극복하면서 많이 성장할 수 있었기에, 지금도 힘들 때면 늘 그때를 떠올리곤 합니다.
어느덧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이지만 잊혀지지 않고 제 안에 존재하는 그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볼까 합니다.

2000년 초, 공부를 마치고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양극 배터리 소재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배터리는 아직 큰 사업매출을 올리는 분야도 아니었고, 미래도 불투명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약 4년 동안 양극 소재개발 및 양산화 등의 업무를 맡았었는데, 함께 개발을 수행했던 직속 상관으로부터
미래 사업으로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연료전지개발’을 함께 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었던 지라 결국 업무를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연료전지라는 것은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수소와 공기 중의 산소를
촉매를 이용해 반응시켜 전기를 만들면서 물과 열을 발생시키는 친환경적인 기술입니다.
연료전지 부서로 이동을 하고 나서 처음에는 소형 노트북용(~25W급) 연료전지 개발을 진행했고,
이후 이동용 전원 공급 및 주택용(0.2~1kW급) 연료전지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그 당시 회사차원에서도 연료전지 관련 개발 인력을 적극적으로 선발했기 때문에
시작할 때 7명에 불과했던 조직원이 3년 후에는 130여명까지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룹 내 관계사 개발인력까지 합치면 약 300명 정도까지 늘어났던것 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소형 연료전지는 백금 촉매사용을 줄이지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사업화가 지연되면서 개발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자동차 등에 확장 가능한 PEMFC(Polymer Electrolyte Membrane Fuel Cell)를 개발하는데 주력했지만
이 부분도 시장이 확대되지 않아 결국은 약 2년 만에 핵심기술인 전극(MEA: MembraneElectrode Assembly) 개발부서만 남기고 모든 인력이 정리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습니다.

PEMFC 연료전지 개발이 중단될 무렵, 중대형 발전용 SOFC(Solid Oxide Fuel Cell, 고체산화물연료전지) 국책과제를 수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제는 삼성 관계사 3사 및 에너지기술연구원 등 14개 산학연이 참여하는 약 380억 규모의 대형 과제였습니다. 회사의 지원 없이 국책과제 수주 비용만으로도 독자적인 과제 수행이 가능했지만, 분산발전용 연료전지는 상용화 가능성이 높다는 경영진의 판단 덕분에 연료전지 과제가 대폭 정리되는 상황 하에서도 발전용 연료전지 개발 인력은 큰 외풍 없이 과제 수행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운 좋게 이 과제에 합류하여 개발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온하게 과제를 수행했던 시간도 잠깐이었습니다. 새롭게 부임하신 신임사장이 SOFC 국책과제를 중단하라는 결정을 내렸고, 당시 SOFC 과제 총괄 책임자였던 담당 임원은 보직에서 해임 되었습니다. 국책과제 중단 시 회사가 감당해야 하는 손해액을 산정해 보니, "정당한 이유가 없이 국책 과제 수행을 중단한 기업에 대해서는 3년동안 신규 국책과제에 대한 참여를 제한한다"는 규정으로 인해,
약 720억~1,000억에 해당하는 금액이 손실금액으로 계산되었습니다.
결국 경영진은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 과제를 수행하긴 수행하되,
최소한의 인력으로 1단계(총 5년 중 3년)까지만 수행한 후 종료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발전용 SOFC 과제 연구원으로서의 꿈을 키워가고 있던 저는 갑자기 회사에서 포기한,
미래가 없는 과제를 3년 동안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SOFC 총괄 과제책임자였던 담당임원은 보직 해임되고,
세부과제 책임자이자 직속 상관인 과제리더까지 요즘 말하는 미투 사건에 연관되면서 서열상 넘버 투였던 제가 하루아침에 과제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제 중단과, 리더 변경이 일어나는 동안 과제원들의 수도 16명에서 10명으로 줄었습니다.
비전도 없고 미래도 없는 해당 과제에서 더이상 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친구들이 재빠르게 부서를 옮기거나 새로운 길을 찾아서 회사를 떠난 것입니다.

저 역시 회사를 가장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부터들었고, 피하고도 싶었습니다.
내가 만든 상황도 아닌데 내가 수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 회사가 중단하기로 결정한 과제에서 ‘3년 후 종료’라는 목표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인생에서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 경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일을 계속 해야 할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회사가 중단한 과제를 수행하는 조직원들에게, 비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며 그것이 리더의 역할”이라고 말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선 팀원들을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조직활성화 시간,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검사를 통해 서로의 성격을 파악해보기도했고,
‘강점혁명’이라는 책을 과제원들과 함께 읽거나 강사를 초빙해 과제원들의 강점을 파악하는 등
서로의 성향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운명처럼 우연히 읽게 되었던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란 책이 저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날카로운 칼날 같았던 저는 누구에게든지 비판적이고 공격적이었습니다.
과제원들과 일을 할 때도 잘 한 일에 대한 칭찬보다는 ‘왜 이렇게 일을 했는지’에 대해 꼬치 꼬치 따져 물었고,
과제원의 논리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게 하려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제게 ‘인간관계론’이란 책은 읽는 동안 내내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옳고 상대방이 틀림을 인정하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을 했지만, 과연 상대방은 인정했을까?’
생각해 보면 아니었습니다.
인정보다는 반감을 가졌을 확률이 더 컸고,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침묵한 그들을 보며
저는 제가 상대를 이해시켰다고 혼자 착각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판 하지 말라. 칭찬 하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흔하게 들어온 말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저는 항상 비판하려 했고, 칭찬에 인색했고, 제 입장에서만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닌데, 과거의 저는 선을 긋고 ‘틀리다’고 단정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저는 그 사람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비판적인 말 보다는 적극적인 경청으로 상대를 대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 그 자체가 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게서 시작된 작은 변화는 팀원들에게도 조금씩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부정적인 입장에서 항상 대립하는 의견을 내던 팀원도 어느새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때 어쩌면 실패를 목표로 한시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우리였지만, 결국 그 어려움 속에서도 비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SOFC 국책과제는 1단계 3년을 수행하고도 추가로 6개월을 지연해,
결국 10명 남은 과제원이 끝까지 과제를 수행하며 ‘성실실패’라는 목표한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과제의 원래 목표에는 미달했지만 성실히 수행한 것을 인정받아
과제 실패 시 일반적으로 받게 되는  ‘패널티’를 받지 않았으며, 과제를 1단계에서 종료한다는 목표는 달성한, 성공적인 결과였습니다.
그 과제를 수행한 이후 저는 어떤 과제를 맡더라도 해낼 자신이 생겼고,
이후 회사의 배려로 제가 원하는 부서로 옮겨 원하는 업무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힘든 과제를 담당하게 되면 다시 한번 그 당시 그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며, 서로 인정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고 또다시 다짐하게 됩니다.
책읽기 좋은 이 가을,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다시 한번 권해봅니다.

 
저처럼 변화하는 새로운 분들이 하나라도더 늘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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