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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반영한 산업화 1세대 창업주들의 어록

Best정보통 2021. 4. 2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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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이 없으면 큰 발전도 없다.”

성수대교 남단 교차로에 있는 한 주유소 벽면에 걸린 글귀입니다. 이 글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한 말입니다. 출퇴근길 버스에서 눈으로만 읽다가 최근 마음속으로 따라 읽는 횟수가 늘었습니다. 빌딩을 뒤덮은 대형 현수막에 쓰인 이 열 두 글자에서 시간을 초월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한국 경제계를 인물 중심으로 나눠보면 현재는 시즌3에 해당합니다.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산업화 시대를 연 창업주가 있었고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반석 위에 올린 2세가 1990~2000년대를 풍미했습니다. 지금은 3세, 4세 기업인이 경영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1·2세대가 기업을 키우고 한국경제를 견인하면서 수많은 일화와 성취를 남겼다면 3·4세대 대부분은 이제 막 기업 경영의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3·4세대 경영자에 관한 뉴스는 글로벌 기업과 치열한 경쟁, 사업구조 효율화 등 경영학 수업에서 다룰 법한 토픽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주제를 탐구하고 곱씹을 사람은 극소수에 그칠 것입니다. 이들이 던진 메시지가 선대 회장처럼 개별 기업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봐, 해보기는 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고민하느라 시간과 돈 낭비하지 말고 한 번 해봐.”

━정주영 1983년 서산 간척지 건설 현장에서

 

 

“귀한 사람을 맡아서 훌륭한 인재로 키워 사회와 국가에 쓸모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은 부실 경영과 마찬가지로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병철 1976년 전경련 기고문

 

산업화 1세대 창업주의 어록은 30~50년 전 한국 사회를 반영한 메시지입니다. 동시대의 한국인에게 수십여 년간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은 기업사(史)에 언급되거나 특집 방송에서 나오는 정도입니다. 사회와 기업 활동이 복잡해지고 글로벌 환경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중견기업 회장들의 입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제기했던 기업가 정신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제 막 기업경영 전면에 등장한 3·4세대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누구의 입을 주목해야 할까요. 바로 매출 1조 원 안팎의 중견기업 회장들의 입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전히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우리와 같은 동시대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기업가 정신은 이들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B2B 기업, 제조 수출기업이기 때문에 친숙하지 않지만, 1980~90년대 사업을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궜거나 도전 중입니다.

 

 

이동채 회장이 1998년 설립한 에코프로와 에코프로비엠 등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양극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대기업과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고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 회장은 “1만 명을 먹여 살릴 회사, 미래를 고민하는 조직을 만들고 싶어 제조업을 시작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에코프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멘트입니다.

 

 

김성권 회장은 1984년 설립한 씨에스윈드를 풍력타워 세계 1위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높이 100m 이상, 수백t 무게의 풍력타워 생산경험이 없었지만 공장 설립 계획서와 풍력타워 도면만으로 바이어를 설득해 수주한 뒤 공장을 세우고 타워를 납품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송호근 와이지원 회장은 1983년 25만 달러 첫 수출을 시작으로 기계산업 강국들과 겨뤄 와이지원을 엔드밀(금속 표면을 깎는 공구) 분야 세계 1위에 올려놨습니다. 매출의 80%가 해외에서 나옵니다. 송 회장은 절삭공구 분야 세계 1위를 목표로 R&D(연구·개발)를 지휘합니다.
세 분의 CEO를 인터뷰하면서 정신이 번쩍했습니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넘어갈 때 수십 가지 혜택이 사라지고 기업에 대한 감시의 눈이 많아지는데도 왜 기업을 키울까 하는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것은 소명의식, 사명감이었습니다. 정주영, 이병철 어록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동감을 전달 받습니다. 인터뷰 기사도 그 점에 포커스를 맞춰 CEO 스토리를 풀어냈습니다.

 

 

권위주의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산업화 1세대와는 다른 경험, 맨손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군 경험은 국내 산업계와 한국 사회에 널리 회자해야 합니다. 중견기업은 국내 기업 비중이 0.6%이고 4,000여 개가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머물면 주어지는 혜택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대기업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하루하루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주영이 설파한 기업가 정신이 4,000개의 중견기업을 토대가 됐다면, 이동채 회장을 비롯한 4,000여 개의 중견기업 대표들이 몸으로 보여주는 기업가 정신은 또 얼마나 많은 후대의 기업인들을 탄생시킬지 기대가 됩니다.
유저들이 원하는 게임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돈을 쓰도록 유도하는 확률형 아이템으로 연 수천억원의 이익을 얻은 게임회사, 자영업자와 근로자를 종속시키는 플랫폼 앱으로 성공한 뒤 지분을 넘겨 부자가 되는 스타트업에서 기업가정신을 논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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